YMCA 역사
한국 YMCA는 1903년 최초의 시청년회로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창립되면서 역사의 표면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기독교에서 구국운동의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을 발견한 민족 지도자들이 대거 가담하면서 교육, 계몽, 선교의 중심으로 떠올랐으며, 활발한 학생사업을 통해 새로운 민족지도력의 배출구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1914년 개성 한영서원에서 전국조직으로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결성하였고, 3·1운동의 과정에서도 그 가교의 역할을 다하였다.
1921년에는 새로운 사회사상과 기독교사상을 소개하는 월간 종합지로 「청년」을 발행하였으며, 애국계몽운동,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민족언론운동, 농촌계몽운동 등의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밖에도 교파를 초월한 평신도운동체로서 이 시기 한국에큐메니칼운동을 주도해 나갔으며, 1927년에는 이상재 선생이 신간회의 초대회장으로 취임하기도 하였다. 한국 YMCA는 일제 말기의 수난과 암흑기를 거치면서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되는데, 지도력들의 대거 검거로 연합회 활동이 거의 중단되었고, 1938년 급기야 일본기독교청년회 조선연합회로 개편되는 굴욕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해방과 더불어 지도력과 조직력이 고갈된 상황에서도 재건을 위한 작업을 진행해 나간 결과 서울, 대구, 부산, 광주YMCA 등이 재건되고, 「청년」이 복간되었다. 6·70년대에는 농민교육과 농촌협동운동, 시민사회의 정론형성을 위한 시민논단, 시민중계실, 청소년문화운동 등의 사회사업개발을 우선하였으며, 신학적 반성과 그 존재이유를 재규정하는 이른바 'YMCA이념추구'를 위한 연구작업이 본격화되었다.
80년대에는 'YMCA운동과 청년성 회복'이라는 기치 아래 활성화된 청년Y운동에 힘입어 시청료 납부거부운동, 교육민주화운동, 소비자운동, 통일운동, 청소년운동, 지역공동체운동 등의 시민운동 과제를 적극 추진하였다. 시대적 요청에 따른 소명을 다하기 위해 노력해온 한국 YMCA는 21세기를 맞으며 우수한 전문지도력을 확보하고 양성하는 일, 한국 YMCA의 주체성을 명확히 정립하고 그 사명을 다하는 일, 평화통일운동의 과정에서 제 몫을 담당하는 일 등 많은 과제가 놓여 있다. 오늘날은 전국 70개 지역YMCA에 10만명이 넘은 회원이 참여하고 있으며, 30만명이 넘는 프로그램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